전시 장소

노화랑

서울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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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소의 전시

종료

2024년 6월 7일 - 2024년 6월 26일

What Happened in The Wonderland

<p>&lt;네 번째 차원&gt;</p> <p><br /></p> <p>노화랑 디렉터 노세환</p> <p><br /></p> <p>모든 작가의 작품은 창작자를 닮아있지만, 이사라의 작품은 특히 이사라 본인과 작품 사이의 거리가 &lsquo;0&rsquo;에 수렴할 정도로 많이 닮아있다. 흔히 말하는 4차원적인 작가는 본인의 네 번째 차원을 작품에서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이에 작가를 아는 이들은 이사라를 4차원적인 사고를 가진 특이한 작가라 생각하겠지만, 아마도 우리 모두도 저마다의 네 번째 차원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이사라는 본인의 4차원을 드러내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게 보일 뿐이다.</p> <p><br /></p> <p>이사라의 네 번째 차원은 본인의 이상적인 공간이다. 작가의 유토피아를 구축하고 정리하는 과정이 이사라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1516년에 라틴어로 쓰여진 토마스 모어의 소설 &lt;&lt;유토피아&gt;&gt;는 &lsquo;초승달 모양의 농업을 기반으로 한 공산사회&rsquo;. 이상향의 대표적인 레퍼런스이자 많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상적인 공간으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경제적, 정치적 안정감을 최우선시하는 이상적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사라의 유토피아는 감정적인 안정감에 초점을 맞춘 부분이 흥미롭다.</p> <p><br /></p> <p>우리 모두가 각자의 이상향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 지극히 개인적인 각자의 결핍을 반영하고, 또는 시대적 결핍을 반영하기도 한다. 토마스 모어의 &lt;&lt;유토피아&gt;&gt;는 먹을거리와 평등한 사회를 유토피아로 담았고, 이사라의 유토피아는 감정적으로 삭막해진 &lsquo;현재사회&rsquo;의 결핍을 반영한다. 사랑하는 감정이 온전히 감정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현재의 결핍은 이사라가 본인의 네 번째 공간인 &lsquo;원더랜드&rsquo;를 구축하는 것에 큰 영향을 끼친다.</p> <p><br /></p> <p>이에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사라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lsquo;몬스터&rsquo;와 그의 역할이다. 이사라 작품의 주인공 격인 &lsquo;소녀&rsquo;와 그 &lsquo;소녀&rsquo;의 이상적 공간을 유지시켜주기 위한 일종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하고 있고, 이는 세계관 안에서 노동의 개념으로 이들은 최하위 계층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이들에게 이런 노동에 대한 보상 개념도 잊지 않고 있다. 이를 보면 현실 세계에서 &lsquo;소녀&rsquo;도 &lsquo;몬스터&rsquo;도 본인 자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일하는 자신과 일의 결과를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분리하여 세계관에 투영하며, 이 관계가 이상적인 공간을 마침내 구축하는 방법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p> <p><br /></p> <p>이는 우리에게 우리가 꿈꾸고 있는 이상이 멀리 있지 않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저 멀리 이루어지지 않을 다소 비관적인 현실을 자조하듯 바라보게 만드는 &lsquo;유토피아&rsquo;의 존재가 사실은 조금만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수 있는 우리 바로 옆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사실을 작가는 그녀의 네 번째 차원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p> <p><br /></p>

종료

2024년 8월 28일 - 2024년 9월 14일

inter-

<p><span style="font-weight: bold;">&lt;inter- (사이)&gt;</span></p> <p><span style="font-weight: bold;"><br /></span></p> <p><span style="font-weight: bold;">문현정 독립 큐레이터</span></p> <p><br /></p> <p>점과 선, 그리고 면. &mdash; 캔버스와 확장된 프레임, 그리고 공간. 여기 최소한의 형식을 통해 공간을 이어내는 작품이 놓여있다. 김효정과 홍정욱이 함께하는 &lsquo;잇은(itt-eun)&rsquo;은 예술에서의 조형과 관계성에 대한 질문을 토대로, 각자의 작품에 대한 개별성을 내려놓고 오롯이 조형적 언어만을 탐구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그들의 뜻은 곧 미술에서 오랜 역사를 함께했던 재현(representation)적 묘사를 전복하고, 시각적인 표상과 형식적 조건만을 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예술의 형태를 모색하는 것으로 이어진다.</p> <p><br /></p> <p>이들에게 예술의 본질은 가장 단순화된 형태로 작품과 세계의 법칙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요소를 포착하기 위한 기하학적이고 유기적인 형태. 구상적 알레고리가 아닌 기하학적 질서와 그것의 증식. 이와 같은 형식은 작품의 조건을 형태와 질료에게 위임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는 추상이라는 형식의 근간이자 모태가 되는, 가장 이상적인 형식을 물리적 실체로 구현하기 위한 방법을 탐구했을 때 만들어지는 초월적 경지와도 같은 것이다.</p> <p><br /></p> <p>&nbsp;</p> <p><br /></p> <p>전시 &laquo;inter- (사이)&raquo;는 두 인물 간의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감을 은유한다. 홍정욱은 정형화된 회화적 프레임을 넘어 공간으로 확장되는 입체적 회화를 제시해왔고, 김효정은 면과 선이라는 형식적 요소를 통해 풍경과 같은 화면을 구성하는 회화를 선보여왔다. 작품은 김효정의 회화로부터 홍정욱의 조형으로 이행하거나 그 역순을 병행하며 각자의 것을 융화해 내는 과정을 토대로 제작된다.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그렇기에 명확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관계성을 드러내는 이번 전시에서, 서로 간의 시간을 축적하고 있는 조형은 비로소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교환된 종합체로 완성된다.</p> <p><br /></p> <p>&nbsp;</p> <p><br /></p> <p>이들의 작품은 궁극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향한다. 변형된 캔버스, 미세한 선과 면의 교차, 날카로운 마감. 추상적 이미지에 선행하여 구성된 형태는 점과 선, 면의 구성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주된다. 모더니티가 직선을 근간에 두고 있었다면, 잇은의 작업은 곡선을 향한다. 외부로 확장되어 뻗어나가는 곡선은 공간과 조응하기 위한 운동성을 내재한 조형적 도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떠한 구상이나 서사적 정보도 내포하지 않는 이상적인 형상은 이데올로기를 견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관객의 시선을 순수한 기하학의 공간으로 이동시키며, 작품과 그것이 존재하는 환경을 상호적 관계망 안에서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렇기에 작품은 독립적인 개체이자 연합적인 환경 속에서 존재하는 관계적 대상으로 남아있게 된다.</p> <p><br /></p> <p>&nbsp;</p> <p><br /></p> <p>홍정욱은 그의 작업을 &lsquo;진화하는 것&rsquo;으로 표현해왔다. 이러한 그의 작업 세계가 이어진 것일까, 잇은의 작품 역시 생장한다. 작가의 개입으로 조형되는, 그럼에도 외부와의 조응을 통해 완성되는 작품은 &lsquo;형식&rsquo;의 층위를 무의미하거나 탈 맥락화된 것이 아닌 잠재적 이데아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로 구성해 내고 있다. 미묘한 조화와 균형을 이룬 형상, 그럼에도 뻗어나가는 운동성을 토대로 표준화된 질서에서 벗어나기를 갈구하는 이미지. 이상을 향하는 그들의 예술은 증식되는 담론 내부에 깊게 잠식한 근본을 탐구함으로써 유의미해진다. 그렇기에 잇은의 작품은 관념적 세계를 넘어 예술을 다시 이상적인 곳으로, 그리고 질료와 물질의 즉물적 영역으로 회귀하도록 만들고 있다.</p> <p><br /></p>

종료

2024년 10월 2일 - 2024년 10월 21일

최영욱전

<p><span style="font-weight: bold;">기대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다독이는 최영욱의 &lt;카르마&gt;</span></p> <p><span style="font-weight: bold;"><br /></span></p> <p><span style="font-weight: bold;">임창섭 미술평론</span></p> <p><br /></p> <p>최영욱은 달항아리를 소재로 그림을 그려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하지만 달항아리는 단지 소재일 뿐, 그는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을 구분해 내는 특출한 감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대할 것 없는 세상, 저절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느슨한 지식이 아니라, 끝없는 믿음과 노력이 우리를 우리답게 만든다는 진실을 보여주려 한다. 결국 그의 그림 &lsquo;카르마&rsquo;(Karma, 업보 혹은 인과관계)는 그 뜻처럼 그렇게 되리라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p>

종료

2024년 11월 13일 - 2024년 12월 2일

방앤리 <카나리아 배포: 모든 거짓말에 대한 증명>

<p><br /></p> <p><span style="font-weight: bold;">&lt;방앤리의 툴킷&gt;</span></p> <p><span style="font-weight: bold;">임수영(미술사학자, 독립기획자)</span></p> <p>&lsquo;연장&rsquo;을 뜻하는 &lsquo;tool&rsquo;과 &lsquo;상자&rsquo;를 의미하는 &lsquo;kit&rsquo;의 합성어인 &lsquo;툴킷(toolkit)&rsquo;은 &lsquo;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 모음&rsquo;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19세기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이 단어의 언급 회수는 인터넷과 컴퓨터가 대중에게 보급된 1990년대에 이르러서 급증하기 시작한다.[1] 그 이유는 당시 툴킷의 의미가 &lsquo;응용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만들 때 도움이 되는 각종 루틴이나 보조 프로그램을 모은 집합체&rsquo;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교육에서부터 디자인, 철학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분야에서 어떤 목적이나 복잡한 내용의 핵심에 효율적으로 도달하도록 수많은 툴킷이 제공되고 있다. 게임 제작 산업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툴킷은 게임 개발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핵심 요소로, 개발자는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여러 가지 단계에서 프로그램 및 소프트웨어 툴을 사용하며, 각 툴은 게임의 다양한 기능을 구현하거나 자동화된 작업을 처리하기도 하고 복잡한 코드를 최소화하거나 다양한 플랫폼에 배포할 수 있는 구조를 지원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툴킷은 복잡한 시스템과 기능을 간소화하고, 창의적 아이디어를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을 돕는다. 도구의 활용 여부에 따라 개발 속도와 품질이 크게 좌우되는 것은 물론이며, 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현대 게임 개발의 중요한 기술적 전략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노화랑에서 열리는 방앤리(방자영, 이윤준)의 전시 《카나리아 배포: 모든 거짓말에 대한 증명 (이하 카나리아 배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필자는 툴킷에 관해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일까? 누군가는 작품과 전시의 핵심만 짚어 달라고, 시간이 없으니 논점을 요약하라고 조바심을 낼 수도 있겠다.</p> <p>&nbsp;</p> <p>방앤리는 이번 전시를 일종의 게임, 보다 구체적으로는 걸으면서 탐험하는 유형의 게임인 &lsquo;워킹 시뮬레이터(walking simulator)&rsquo;의 방식으로 구상했다. 다만,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유통하는 갤러리라는 물리적 공간에 펼쳐진 게임에서 현실을 &lsquo;증강&rsquo;하거나 &lsquo;가상&rsquo;으로 대체하는 기기는 찾아볼 수 없다. 텍스트, 평면, 입체, 영상 매체로 구성된 공간만 존재할 뿐이다. 전시가 정교하게 구축된 하나의 게임이라고 가정할 때, 제목이 제시하는 것처럼 이번 게임은 플레이어-관객의 반응을 살피는 베타 버전에 가깝다. &lsquo;카나리아 배포(canary release)&rsquo;는 조금씩 사용자의 범위를 늘려가며 새로 개발된 앱을 점진적으로 배포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즉, 관객의 입장에서 이번 전시는 개발 과정에 놓인 게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2]. 그렇다면 방앤리가 배포한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철학자 C. 티 응우옌에 의하면 게임의 목표(goal)와 게임을 플레이하는 목적(purpose)은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할 지점이다. &ldquo;게임의 목표란, 맨 먼저 결승선에 도달하거나, 공을 바구니에 더 많이 넣거나, 점수를 가장 많이 따는 등 게임을 하는 동안 이루고자 겨냥하는 목표물(target)이다. 반면, 게임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목적이란 애초에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는 이유이다.&rdquo;[3] 물론 목적은 다양할 수 있으며, 목표와 목적은 같을 수도, 또는 완전히 어긋날 수도 있다. 파티 게임에 참여하는 누군가에게 목표는 이기는 것이지만, 그 목적은 즐기는 것인 것처럼 말이다.</p> <p>&nbsp;</p> <p>역설적으로 《카나리아 배포》는 게임 이길 자처하면서 동시에 게임의 특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있다. 굳이 이 전시-게임이 상정하는 목표를 정의하자면 걷기를 수행하는 것, 그 과정에서 관객-플레이어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지 않을까. 게임을 하는 동기야 각자의 상황과 배경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카나리아 배포》는 일시적인 재미, 스트레스 해소, 능력치 향상 등의 목적을 가진 관객-플레이어에겐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모든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고 질문해 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ldquo;모든 거짓말&rdquo;은 무엇이며 이것은 정말 &ldquo;증명&rdquo; 될 수 있는 것인가?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전시의 형식으로 구현한 게임을 배포하는 설정은 적합한가? 질문해 볼 수 있지 않나. 필자는 방앤리가 이러한 관객-플레이어의 끊임없는 물음을 유도하기 위해 어떤 &lsquo;툴&rsquo;들을 선별적으로 활용해 전시-게임을 구성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p> <p>&nbsp;</p> <p><span style="font-weight: bold;">도구 1 &ndash;&nbsp; 시의 언어</span></p> <p>시는 방앤리의 전작에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이자 지도로, 때로는 평면 그림에 삽입된 문구이자 파편화된 장면을 연결해 주는 서사로 등장한 바 있다. 이번에 그들은 정서나 사상을 운율적인 언어로 압축해 표현하는 &lsquo;시&rsquo;라는 문학 양식을 게임 매뉴얼(game manual)로 상정한 듯하다. &ldquo;Run! 뛰어!&rdquo;로 시작하는 본문이 곧 제목인 이 시는 명령조로만 이루어져 있다. 시-매뉴얼은 다급하게 주문한다. 대상은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피하고, 점프하고, 총에 맞지 말라고. 전시장에 들어서며 자신도 모르게 방앤리가 설정한 게임에 &lsquo;로딩&rsquo;된 관객-플레이어는 밀려 들어오는 명령을 따라 수행할지, 또는 가볍게 무시할지 결정하게 된다. 그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말이다.&nbsp; 반면 「The Broadway Ave. En Route」 는 이미지로 구조화된 시로, 마치 부르마블 보드를 연상시킨다. 실존하는 곳인지 알 수 없는 브로드웨이 대로에 마치 존재할 것 같은 가게명&mdash;그리고 그들의 생존 여부&mdash;가 도로를 중심으로 마주 보고 있듯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에도 &ldquo;여기서 시작합시다 &ldquo; 또는 &ldquo;유턴하시오&rdquo;와 같은 명령어가 자리 잡고 있다. 「파사드/페이스(Fa&ccedil;ade/Face)」와&nbsp; 「조안나 카페의 조식(A Breakfast at Joanna&rsquo;s Caf&eacute;)」은 명령과 배경만 존재했던 곳에 파편적이지만 플롯과 인물, 그리고 서사를 덧붙인다. 결과적으로 시-매뉴얼은 전시-게임의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이를 이해할 수 있는 핵심 정보로 존재한다.</p> <p>&nbsp;</p> <p><span style="font-weight: bold;">도구 2 &ndash; 걷는 여정</span></p> <p>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움직임, 시간, 거리. 방앤리의 작업에서 여정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곳이자 재구성되는 상황이 되기도 하고, 현실에서 메타버스로의 진입이나 인생에서 가장 낯선 곳으로의 상상이 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게임에서 &lsquo;여정&rsquo;은 관객-플레이어가 걷기를 수행하며 시작되고 그 행위를 반복할 때 지속된다. 전시-게임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셈이다. 신작 유화 &lt;Walking the Prairies&gt;과 &lt;The Broadway Ave.&gt;를 중심으로 벽면에 설치된 다채로운 색감의&mdash;그러나 어딘가 메마르고 빛바랜 느낌을 자아내는&mdash;평면 작업들은 이 걷기의 배경이자 시각적 지표로 존재하며 여정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구체적인 경험이 되도록 자극한다. 시-매뉴얼이 언급하고 있는 조안나 카페가 바로 여기인가? 이곳이 곡물창고인가? 익숙한 듯 낯설고, 황량해 보이는 북미의 어느 한 동네인 듯한 장소에 떨어진 관객-플레이어들은 나름의 방향성과 속도, 방식으로 이곳을 탐색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는 시각적, 신체적 탐색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심리적, 정신적인 탐색전이 될 확률이 높다. 눈앞에 놓인 시청각 정보들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듯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궁금증을 자아내기 때문이다.</p> <p>&nbsp;</p> <p><span style="font-weight: bold;">도구 3 &ndash; 상상의 과거&nbsp; &nbsp;</span></p> <p>&ldquo;다시 돌아가 보자.&rdquo;[4] 방앤리는 제안한다. 시간을 되감아 보자고. 이렇듯 기억과 과거, 기록과 흔적은 방앤리가 작업을 통해 재차 방문하고 상상하는 대상이 된다. 《카나리아 배포》에 포함된 작업들은 예술계가 부여하는 &lsquo;구작&rsquo; 또는 &lsquo;신작&rsquo;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작품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상호 참조하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실제로 전시-게임이 설정하고 있는 배경과 상황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 것으로, 지속적으로 반복 교류가 일어나는 두 사람의 기억을 일정 부분 재구성하고 있다. 그들은 기억할 수 없는 것,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그리고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의 간극을 허구(fiction)와 상상(simulation)으로 이어보고, 그 과정에 관객-플레이어가 함께하기를 기대한다.</p> <p>&nbsp;</p> <p>《카나리아 배포》을 구성하고 있는 툴킷을 되짚어 보면 우리는 작가가 언어, 행위, 시간 등을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방앤리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추구하기보다, 목적 지향성을 거부하고 생산의 속도를 현저하게 늦추거나 효율 자체를 의심하는 방식을 택한다. 매끄러운 완결을 추구하는 대신, 완성이라는 환상에서 일부러 미끄러지는 요소들을 툴로 설정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는 매뉴얼이 될 수 있고, 움직임은 심리가 될 수 있으며, 기억은 상상될 수 있다. 관객인 우리의 몫은 이렇듯 범주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자유로움을 충분히 만끽하며 전시이자 동시에 게임인 현실에 접속해 보는 것이다.</p>

종료

2025년 2월 12일 - 2025년 3월 1일

서희선 <Connected-home>

<p><span style="font-weight: bold;">연결된 집 Connected-home</span></p> <p><br /></p> <p>이전의 작품 &lsquo;Mercy&rsquo;는 우리 내면의 불완전한 감정을 보듬고 쓰다듬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일상의 이미지들을 스토리 형식으로 선보였다. 밝고 화려한 색채, 세밀하고 반복적인 패턴을 통해 감정의 변화무상함을 구상적인 이미지와 초현실적인 표현의 조형성으로 나타내었다. 그러나, 최근 작업에서는 과거 작업에 나타난 집의 외형적인 이미지와 복합적인 구성보다는 &lsquo;집&rsquo; 이미지를 대상으로 본질적인 평온함에 더 집중하여 단순하고 명확하게 표현하게 되었다.</p> <p><br /></p> <p>집은 단순히 기능적 공간의 재현이 아닌 시간과 기억의 공간이며, 안식처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작품 속의 &lsquo;연결된 집 Connected-home&rsquo;은 구조적 공간과 정서적 공간의 중첩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조율된 공간을 재구성하여 시각화하였다. 공간을 분할하고 만들어 나가면서 보편적인 집의 의미를 떠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공간, 사유가 되는 공간으로 그려지게 된다.</p> <p><br /></p> <p>도시 속의 하늘과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 집, 건물의 윤곽선(스카이라인)을 자주 관찰하게 된다. 하나의 집 경계선이 끝나고 또 다른 집이 연결되는 선들은 우연과 불완전함이 만든 또 다른 비구조적 집을 만들게 한다. 여러 선의 수평과 수직이 만나서 하나의 이미지로 구축되어가는 연결된 집은 때로는 비균형적이거나 비정형적일 수도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완벽한 관계성을 희망하며 온전한 집의 형태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불완전하게 연결된 집 속에서 내면의 질문과 맞닥뜨리는 명상은 위안의 시작이 된다. 그 공간 안에서 온전함과 불완전함은 기억의 잔상들과 관계를 반추하게 되며 안정감과 평온함을 채우게 된다.</p> <p><br /></p> <p>발터 벤야민은 &lsquo;건축은 흔적의 장소를 만드는 행동과 동일시 한다.&rsquo;라고 했듯이 집은 우리의 감각적 경험과 존재의 흔적이 베여 있는 공간이다.&rsquo; 나의 작업의 시작은 여러 시점의 집 이미지를 연결해 우연적인 선들의 교차로 다듬고 생략되며 채워나가면서 비구조적 집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캔버스 위에 크레용의 무수한 색들을 긋고 겹치고 닦아내면서 자연스럽게 남은 색 면 위에 반투명의 물감을 여러 번 올리면서 흔적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그런 반복적인 작업 속에서 다층적 기억의 흔적은 화면 속을 채워지고 정제된 감정의 무게감으로 남기게 된다. 단순화된 비구조적 공간 속에서 명료한 가는 선들은 작업의 마무리 과정에서 선을 그으면서 온전함과 불완전함의 감정의 깊이를 풀어내듯이 관대해지며 마무리하게 된다.</p> <p><br /></p> <p>위대한 건축은 측정할 수 없는 것에서 시작하며, 설계과정에서는 측정할 수 있는 것을 통하여</p> <p><br /></p> <p>진행되지만, 마지막에는 다시 측정할 수 없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nbsp; &nbsp; &nbsp;&ndash;건축가 루이스 칸-</p> <p><br /></p> <p>나의 작품 &lsquo;연결된 집 Connected-home&rsquo;은 가름할 수 없는 불완전한 감정의 흔적들로 공간을 채워 온전한 집으로 회복하려고 한다. 그리고 스스로 절제되어 단순하고 단단한 집이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p> <p><br /></p> <p>서희선</p>

종료

2025년 2월 12일 - 2025년 3월 1일

서희선 [연결된 집 Connected-home]

<p><br /></p> <p><span style="font-weight: bold;">&nbsp;서희선 연결된 집 Connected-home&nbsp;</span></p> <p>&nbsp;</p> <p>노화랑은 서희선의 개인전 을 2025년 2월 12일(수)부터 3월 1일(토)까지 개최하며, &lsquo;집&rsquo;의 형태를 통해 작가의 내면과 감정의 흐름을 조형적으로 표현한 &lsquo;연결된 집&rsquo; 연작 46점을 선보인다.</p> <p>&nbsp;</p> <p>이번 전시은 &lsquo;집&rsquo;을 소재로 감정의 회복 과정에 집중한다. &lsquo;집&rsquo;의 형태와 구성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고스란히 비추며, 개인적인 시간과 감정이 축적되는 공간이 된다. 작가는 &lsquo;집&rsquo;을 곧 &lsquo;나&rsquo;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마주하고 감정을 보듬는 소재로 사용하였다. 작가는 다양한 건물의 윤곽선을 관찰하고 수집한 후, 면과 선의 요소들을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단순하면서도 단단한 공간의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레이어를 쌓아 올려 사유의 공간으로 확장하였다. 작품 속 집에는 작은 크기의 문과 창문이 등장하는데, 단순한 출입의 용도가 아니라 마음의 비상구이자 숨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공간 안에 그려진 굵은 스크래치는 작가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며, 무수한 가는 선들은 감정을 느끼고, 변화하고, 정리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p> <p>&nbsp;</p> <p>작가는 여러 색의 크레용을 반복해서 긋고 닦아내어 만들어진 색 면 위에, 반투명한 물감을 여러 번 덧입히는 과정을 통해 감정의 흔적과도 같은 수많은 레이어를 쌓아 올린다. 이후, 그 위에 가는 선을 긋는 행위로 정리된 감정을 표현하며 작업을 마무리한다. 이러한 다층적인 작업 방식은 감정이 축적되는 과정을 담아내는 동시에, 공간과 감정의 연결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p> <p>&nbsp;</p> <p>&lsquo;집(House)&rsquo;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지만, &lsquo;집(Home)&rsquo;은 감정과 기억이 담긴 정서적 공간이다. 전시 제목 에서 보이듯, 서희선의 집은 비정형적이고 불완전하게 시작하지만, 감정과 흔적이 쌓이며 균형을 찾아가고, 점차 단단한 공간이 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의 &lsquo;연결된 집'에서 내면을 정리하며 각자의 안식처를 발견하기를 바란다.</p>

종료

2025년 3월 19일 - 2025년 4월 9일

정의부

<p><br /></p> <p>정의부의 연구</p> <p><br /></p> <p>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ldquo;연구(research)란 무엇인지&rdquo;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은 답변들이 흘러나온다.</p> <p><br /></p> <p>&ldquo;인간의 핵심에 가까운 것&rdquo;</p> <p><br /></p> <p>&ldquo;끝없이 추진하는 것&rdquo;</p> <p><br /></p> <p>&ldquo;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재구성하는 것&rdquo;</p> <p><br /></p> <p>&ldquo;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것&rdquo;</p> <p><br /></p> <p>그 어느 때보다 예술에서도 연구가 강조되는 시대다. 이제는 미술대학에서 연구로서의 예술, 또는 예술을 통한 연구로 학위를 수여하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작 과정에서 조사연구를 방법론으로 삼는 작업은 동시대미술 전시에서 &lsquo;필수적으로&rsquo; 등장하는 상황이 되었다. 영국 비평가이자 미술사학자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작금의 현상을 두고 &ldquo;정보 과부하&rdquo;의 상태로 명명하며, 관객 또한 작가가 제공한 방대한 양의 정보를 훑어보거나 선별적으로 보는 새로운 관람 태도를 취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연구 기반의 예술이 학술 연구의 한계를 뛰어넘을 방법은 무엇일까?</p> <p><br /></p> <p>필자가 정의부 작가의 개인전에 부치는 서문의 시작을 연구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을 &lsquo;서정적 풍경화&rsquo;나 &lsquo;한국적 서양화&rsquo;, 또는 &lsquo;구상적 추상&rsquo; 같은 진부한 범주 안에서 논하는 대신 60여 년에 걸친 그의 작업을 하나의 통합적인 회화적 연구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22점의 작품은 소수의 선별된 평면 회화로, 특히 그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 그림들과 주로 2008년 이후에 완성된 모란 작업을 포함한다. 1940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한동안 미술 교사로 활동했던 정의부는,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30대의 나이에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회화를 전공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미전(국전) 심사위원뿐 아니라, 여러 국제 미술교육 관련 활동과 협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후학 양성과 미술 교육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p> <p><br /></p> <p>1964년에 가졌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정의부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던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계의 풍경은 다원주의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국전의 영향력은 점차 쇠퇴해 가고 한국 작가의 국제전 진출이 증가하면서 &lsquo;한국성&rsquo; 또는 &lsquo;한국적&rsquo;인 미술에 대한 움직임과 논의가 대학교와 협회, 그리고 작가그룹 단위의 분파로 나뉘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단색화가 가장 강세를 보였지만, 그 이면에 극사실주의, 개념미술, 오브제 및 설치미술, 비디오 아트, 이벤트, 실험영화 등 다양한 경향이 공존하며 양상을 보인 시기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70년대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듯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언론 통제와 검열 등 정치적 탄압이 자행되고 있어서 &ldquo;사회현실을 반영한 실제적인 미술 활동은 미세한 지엽적 현상&rdquo;에 불과한 시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p> <p><br /></p> <p>이후의 한국 현대미술은 반모더니즘 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중미술이 이끄는 1980년대를 거쳐 포스트모더니즘과 지역 예술, 비엔날레가 주도했던 1990년대, 미술 제도와 시장이 확장하는 가운데 미디어아트에서부터 사회참여형 실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와 담론이 공존했던 2000년대 순으로 서술되곤 한다. 현재진행형이던 미술은 역사화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대적 구분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움직임, 그리고 작가들로 규범화되기 시작한다. 마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미술의 발전이 존재하는 것처럼 작동하는 미술사는 결국 특정 맥락이나 관점, 이론이나 의제에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시도와 움직임, 작가들의 활동을 빗겨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역사화 되지 않았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p> <p><br /></p> <p>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현대미술의 풍경 속에서 정의부는 꿋꿋이 채색 유화의 언어와 형태, 구성과 구조의 가능성에 몰두하며 그림을 그렸다. 관찰하는 두 눈은 늘 눈앞에 놓인 자연을 탐구했고, 평면의 정지된 이미지로 표현하기에 앞서 오감으로 자연을 체화하려는 두 발은 세계 곳곳을 걸었다. 회화라는 매체와 자연의 풍경을 연구의 주제이자 대상으로 삼은 그는, 화가나 교육자의 면모만큼 연구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정의부가 생전에 자기 생각과 경험, 건너 들은 이야기를 진지하고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글, 그 생각의 흔적을 단서 삼아 작가의 연구 방식을 가늠해 볼 수 있다.</p> <p><br /></p> <p>&ldquo;어떤 화가가 2~3일 걸려서 그린 그림을, 파는 데는 2~3년이 걸린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자 누가 답하기를, &ldquo;당신이 그 그림을 2~3년에 걸려서 열심히 그렸다면, 아마 1~2일 안에 팔렸을 거요&rdquo;라고 했단다.&rdquo; &ndash;정의부, 「나는 50년을 연구했고」, 『세월을 다듬는 그림들』, 38쪽</p> <p><br /></p> <p>생성형 기술로 시각물을 생성하는데 비단 몇 초도 소요되지 않는 오늘날, 소위 말해 &lsquo;가치 있는 그림&rsquo;을 그리기 위해 그만큼 충분한 시간을 투자할 것을 강조하는 이 일화는 일견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표면적으로 생성된 결과보다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과정을 체화하는 노력이 연구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정의부는 낙조, 강, 바다, 산골 마을 등 자연 속을 비상하는 철새들을 추상화해 표현한 작품으로 줄곧 대표되어 왔지만, 그가 주목했던 회화의 요소는 좀 더 구성적이고 근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그는 특정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으로써의 색채 사용을 고민한다:</p> <p><br /></p> <p>&ldquo;흔히 말하기를 동양3국 가운데 중국은 형태요, 일본은 색채고 우리나라는 선이라 한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선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감각은 대단했으나 색채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나 재료에 좀 무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hellip;] 꽃 그림에서 특히 장미 같은 것은 그 색채가 우리에게 주는 환희와 감정의 전달을 가장 중요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묘사에 치우친다든지, 색채의 혼합에 신경을 쓴 나머지 원색의 강렬함과 호소력이 경시되는 경향이 후학들에게 종종 발견된다.&rdquo; 정의부, 「색채란!!」, 『鄭義富』, 280쪽</p> <p><br /></p> <p>색채에 대한 고민은 캔버스의 평면(plane)이 무한하고도 제한된 공간과 그 안에 자리 잡는 형체에 대한 부분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캔버스의 텅 빈 화면을 마주했을 때, 눈앞에 마주한 장면과 대상을 어떻게 담아낼지 주저하며 두려워하게 되는 화가의 마음을 솔직하게 기록하며 정의부는 이렇게 고백한다.</p> <p><br /></p> <p>&ldquo;경험이나 그림이 미숙한 사람일수록 공간 공포증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그래서 화면 배경에도 앞의 주제를 살리기보다 뭔가 열심히 칠해서 빈 공간 없이 빡빡하게 메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나도 이 공포증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한 결과 색채와 형체의 단순화였다.&rdquo; &ndash; 정의부, 「공간 공포증이란!」 『鄭義富』, 292쪽</p> <p><br /></p> <p>이번 노화랑 전시의 주축을 이루는 모란 그림들은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회화의 색채와 형태, 공간의 구성을 조금씩 변주하며 연구한 과정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장면이지만 미세한 차이를 통해 그는 꽃의 시선에서부터 미소, 수다, 향기, 그리고 조화로움을 포착한다. 무엇인가를 정복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대가(master)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자연과 회화를 수십 년간 연구하고도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았던 작가의 태도에서 우리는 어쩌면 &lsquo;연구하는 화가&rsquo;의 새로운 정의를 떠올려 볼 수 있지 않을까.</p> <p><br /></p> <p>&ldquo;내 비록 50여 년간 그림을 그려왔고, 또 세계를 누비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지만 이 위대한 자연의 모습 앞엔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어쩔 수 없다.&rdquo; &ndash; 정의부, 「금강산!」 『鄭義富』, 119쪽</p> <p><br /></p> <p>―임수영 (미술사학자, 독립기획자)</p>

종료

2025년 4월 24일 - 2025년 5월 14일

금박연 김기호 <우주를 새기며>

<p>우주를 새기며</p> <p>2025년 3월 28일&nbsp; (노화랑 개인전을 준비하며)</p> <p><br /></p> <p>서울 북촌의 공방 금박연, 작은 정원에 매화 나무가 꽃을 가득 채울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곳 공방은 뒷마당 쪽으론 한옥으로 둘러진 계동이 한눈에 보이는 &lsquo;도심의 아름다운 작은 섬&rsquo;입니다. 휴가 온 관광객 중에는 가끔 대문 옆 제 작은 작업실 쪽마루에 앉아, 30분 이상 조용히 풍경을 감상하며 명상하시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p> <p><br /></p> <p>오늘은 이곳 공방에서 저와 아내(박수영), 장남(김진호)이 함께 작업을 합니다. 평소에는 저의 집 작업실과 북촌 공방 두 곳을 오가지요. 금박 부금(付金)에는 여러 과정 중 저에게 가장 어려운 두 가지의 작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금박풀을 만드는 것과 금박문양을 만드는 것입니다.</p> <p><br /></p> <p>금박풀은 금박을 붙이는 대상과 금박 사이를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과거 조선시대 의복에 금박을 부금 할 때는 아교와 어교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이를 사용하지만 좀 더 발전된 형태의 것들도 존재합니다. 풀은 잉크로 대상물에 인쇄하듯이 섬세하게 찍혀야하고, 적절한 점도와 강도 또한 요구됩니다. 기물의 경우에는 옻칠이나 황칠을 사용합니다. 즉 금박풀은 대상물에 따라 적절한 형태로 만들어져야 하기에 기능적 측면의 넘어야 할 산입니다.</p> <p><br /></p> <p>또 다른 산은 문양입니다. 금박문양은 그 형태에 각각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한국적인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지요. 이 외에 현존하는 시대적 문화의 특징도 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양은 탄생 당시의 문화와 역사가 담긴 문화적 생명체입니다. 이번 작품에 사용된 하나 하나의 금박문양들은 조선왕실에서 시작되어 금박연에 전승된 우리나라의 유산과 본인에 의해 진화되고 탄생되었습니다. 저는 이들을 어울려 새겨, 일정 규모의 &lsquo;작은 금빛 우주&rsquo;를 만들었습니다.</p> <p><br /></p> <p>전통 문양이라는 것은 과거를 기반으로 진화하고 성장하는 생명과 같습니다. 또한 무생물인 작품들로 표현되어 고정되지만, 세월에 의해 퇴화되고 소멸됩니다.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우리들 개개인이나, 우주의 모든 생명과 물질처럼 말입니다.</p> <p><br /></p> <p>이렇게 크고 작은 산을 오르내리며, 하루하루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여정은 때로는 힘들고 어렵기도 하지만, 작품을 완성하고 전시를 할 때면 마치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와 같은 상쾌함과 감동을 느낍니다.</p> <p><br /></p> <p>저의 작업은 끊임없는 긴장과 기쁨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오름과 내림, 탄생과 소멸이 공존하는 작은 우주라 생각합니다. 나무 한 그루를 베었을 때 보이는 하얀 나이테 속 흔적과 새벽녘 산 새나 풀 벌레의 울음 속에도 작은 우주가 존재하지요. 이를 별처럼 새긴 문양들은 우리 우주의 흔적입니다.</p> <p><br /></p> <p>앞으로도 삶 속에서 좀 더 새롭고 아름다운 문양들로 작품을 만들겠습니다.</p> <p><br /></p> <p>저는 오늘도 가슴에 별을 품고, 금빛 우주를 새깁니다.</p> <p><br /></p> <p>국가무형유산 금박장 보유자 김기호</p> <p><br /></p>